4 - Conversation
4 - Convers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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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늘어진 가로수 밑, 흰 얼굴의 조금 마른듯한 장발의 청년이 그늘에 기대 서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 형?? ..이런..벌써 끊어버렸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하..수하였다.
길게 울리는 통화 종료음을 들으며 수하는 멍해졌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한시간 전쯤 휴대폰을 들고 있던 이 손에는 지금은 얌전히 가방에 잠자고 있는 검은색의 콜트가 들려져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무런 감각 없이 사람을 죽이고 또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생활하는 것..
수하는 가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사람의 내일을 빼앗고는 행복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두렵고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그래서라도 죽을 수는 없었다.
마음 속에 남 몰래 품고 있어야 하는 아픈 사랑 때문에..
멍해있던 수하의 눈앞에 사이가 좋아 보이는 연인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을 본 수하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상대가 여성이었다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으리라..
눈앞에 스쳐가는 그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수하에겐 그 어떤 것보다도 부럽게 느껴졌다.
한참을 주변을 살피던 수하는 이내 조용해 보이는 커피숍을 찾을 수 있었다.
딸랑-.
"어서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친절한 점원의 목소리와 함께 감미로운 클래식의 음악이 수하의 귓 속을 간질였다.
살며시 미소를 지어 점원의 인사에 응한 수하는 커다란 창가로 걸어가 그곳에 마련된 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쇼파에 몸을 기댔다.
"주문하시겠어요?”
또다른 직원이 다가와 수하에게 말을 건넸다.
메뉴를 보며 한참을 생각하던 수하는 점원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어떤게 좋을까요?"
점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
"과일을 좋아하신다면 생과일 쥬스도 좋고요, 커피, 아. 원두로 내린 거예요. 취향에 맞춰드릴 수도 있구요. 홍차라던지 녹차라든지. 얼마든지 취향에 맞는 게 있지만. 대낮에 술은 조금 그렇겠죠?"
수하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점원에게 말을 건넸다.
"누나…누나맞죠? 누나는 여기 일하면서 여기 음식 다 먹고, 마셔봤나요?"
수하의 질문에 점원은 풋하고 웃으며 물었다.
"일행분 오실 것 같은데 잠깐만 여기 앉아도 될까요?"
수하는 생글생글 미소를 떼지 않는 그녀가 싫지 않아 가볍게 끄덕였다.
수하가 승락 한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조용히 맞은편에 가 앉았다.
"이 까페 열고서 그런 질문을 한 손님은 손님이 처음이예요. 이래뵈도 이 까페 주인이고요. 강 은하라고해요. 은하."
평범해 보이는, 그것도 점원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은하가 주인이라 하자 수하는 조금 놀란듯 물었다.
"에에..정말요?"
"풋..그럼 사람 앞에 놓고 농을 할까요?"
생글생글 웃으며 응하는 은하의 태도에 수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평범한게 좋잖아요? 주인이라고 이런 일 하지 말란 법도 없고요. 오히려 이런 편이 식구들과 맘이 더 잘 트여서 편한 것 같구요. 같이 일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 식구잖아요?"
같이 일하는 식구라는 말에 수하는 가슴 한 켠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다 은하의 말이 흥미로워 수하는 은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까 물었죠? 모든 메뉴를 다 먹고 마셔봤냐고.."
빙긋 웃으며 말을 잇는 은하의 말에 수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까페의 모든 메뉴는 전 식구가 모여서 품평 후에 내놓는 거예요. 신메뉴는 무조건 시식을 하죠. 향이 떨어지거나. 질이 떨어지면 그 메뉴는 다시 컨버젼하거나 버려지는 거예요. 그만큼 자신있답니다."
자신감에 찬 은하의 목소리에 수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자부심이 대단하네요. 멋져요."
"무슨 일이든. 자신과,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뿐더러. 쓸모 없는 일은 없으니까요."
수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창 밖을 살폈다.
창밖에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저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다들 행동이 각양 각색이었다.
그런데 그들과 다른 자신은 세상에 어떤 의미를 갖고 태어난 것일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는 자신은 세상에 있어 어떤 존재일까..
수하는 한참의 침묵 후에 건성으로 답했다.
"그런 것 같네요."
수하가 조용히 대답하자 은하는 메뉴 판을 열어 메뉴를 쭉 손으로 훑었다.
메뉴를 쭉 넘기던 그녀의 손가락이 멈춘 것은 커피메뉴였다.
"커피좋아해요? 에스프레소."
수하는 마음 한구석을 들킨 것 같은 표정으로 은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맞나보네요. 그렇게 얼굴에 점쟁이세요? 라고 써놓으면 사람 민망하지요?"
은하는 여전히 싱긋 웃으며 장난을 걸었다.
"사람을 여럿 상대하다 보면 그 사람과의 몇 마디의 대화로 그 사람의 취향을 쉽게 알 수 있지요. 직업마다 특색이 있듯.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럼..커피에 어울리는 메뉴는 역시 쿠키류나, 케이큰데.. 에스프레소면 살짝 단듯하면서 달지 않은 게 좋겠군요. 플레인 치즈케이크 어떤가요?"
세심하게 꼼꼼히 생각하여 메뉴를 추천한듯한 은하의 표정에 수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그렇게 끄덕이지만 말고요. 싫다면 다른 메뉴 볼까요?"
은하의 손가락이 메뉴의 페이지를 넘기려 하자 수하가 급하게 말리며 말했다.
"아..아녜요. 좀 전에 추천해주신 메뉴로 부탁해요."
은하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아, Ichliebedich의 뜻이 뭔지 아나요?"
"음...그게 어디 말이죠..?"
"독일어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이죠. 이 까페 이름이예요. 꼭 기억해주세요."
은하의 말에 수하는 무어라 마땅히 할 말이 없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가 카운터 너머로 사라지고 나자 말상대가 없어진 수하는 스피커를 통해 조용히 울리는 클래식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어딘지 모르게 밝은 듯, 어두운 듯..그리고 슬픈 듯, 애절한 듯 우는 바이올린 현의 울림.. 그 울림에 몸을 맡기자 피곤이 살짝 밀려와 슬며시 눈이 감겼다.